우리는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잊으려 애쓰고, 다시 사랑합니다. 영화 《중경삼림》은 이 단순한 감정의 순환을,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감성으로, 때론 유쾌하게 때론 아주 쓸쓸하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마치 꿈속에서 흐르는 듯한 카메라, 텅 빈 도시 한복판에서 흘러나오는 느린 팝 음악, 너무나 혼자인데 그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 《중경삼림》은 겉으로는 홍콩의 두 형사 이야기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지나온 감정의 잔해를 아름답게 복원한 영화입니다.
줄거리: 두 형사와 두 여자, 그리고 서로 엇갈린 시간
영화는 두 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연을 겪은 경찰 223번, 헤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생각하며, 언젠가 그 시간도 지나가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피아 조직에서 일하다 실패한 신비로운 금발 여성과 우연히 만난 그는, 그녀와 함께 새벽을 보내며 묘한 감정의 온기를 느낍니다. 그 만남은 스쳐가는 것이었지만, 그녀를 통해 그는 자신의 마음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또 다른 실연을 겪은 경찰 663번과 패스트푸드점 점원 페이의 이야기입니다. 663번 역시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후 쓸쓸한 일상을 보내고 있고, 그를 바라보던 페이는 조금씩 그에게 빠져듭니다. 그녀는 몰래 그의 집에 들어가 청소를 하기도 하고, 집안의 물건을 바꾸며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663번은 그 변화들을 눈치채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페이는 어느 날 갑자기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 1년 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는 어떤 확정적인 결말도 주지 않지만, 그 여백 속에서 가장 찬란한 여운을 남깁니다.
감정을 스치는 연기와 캐릭터
양조위가 연기한 경찰 663번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지만, 그 침묵 속에 수많은 정서가 숨어 있습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느릿한 말투, 홀로 집안 물건과 대화하는 장면들은 무너진 마음을 최대한 조용히 다루려는 태도처럼 보입니다.
상대역 페이를 맡은 왕페이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집니다. 자유롭고 장난기 넘치며,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에 다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특히 그녀가 패스트푸드점에서 듣던 “California Dreamin’”이 흘러나오는 장면은, 그녀의 감정과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상징처럼 쓰입니다.
린칭샤가 연기한 금발의 미스터리한 여성은 또 다른 외로움의 얼굴입니다. 그녀는 시종일관 선글라스를 쓰고,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보이지 않으며, 위험한 일에 휘말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무력감과 체념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금성무가 맡은 경찰 223번은 무모할 정도로 감정에 솔직하고, 잊지 않기 위해 집착하고, 결국엔 그 기억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는 인물입니다. 그 과정이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실연이라는 감정의 현실적인 단면입니다.
왕가위의 연출과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
《중경삼림》은 감정의 리듬을 카메라와 편집으로 구현해낸 대표적인 영화입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 스쳐 가는 사람들, 끊어지고 반복되는 대사, 슬로우모션과 프레임 조작. 이 모든 것이 감정의 흐름과 완벽하게 맞물립니다.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홍콩의 뒷골목과 좁은 아파트, 패스트푸드점과 지하도 같은 일상의 공간을 낯설고 시적으로 담아냅니다. 홍콩이라는 도시 자체가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느슨하게 만들어 관객에게 여백을 주고, 해석의 자유를 열어둡니다. 그래서 《중경삼림》은 한 번 보고 이해되는 영화가 아니라, 두 번 세 번 보며 각자의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영화입니다.
관객의 반응과 문화적 영향력
《중경삼림》은 1994년 홍콩에서 개봉된 후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독립영화와 아트하우스 영화를 즐기는 관객층 사이에서 이 작품은 ‘감성 영화’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습니다.
영화의 OST는 지금도 널리 사랑받고 있고, 왕가위 감독 특유의 분위기는 수많은 영화와 뮤직비디오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관객들은 “이별의 감정을 이렇게 예쁘게 표현한 영화는 처음이었다”, “이 영화는 줄거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기억된다”, “나도 언젠가 223번처럼 슬픔에 유통기한을 정해본 적 있다”는 후기를 남깁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사랑을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
《중경삼림》은 사랑에 대한 영화지만, 동시에 ‘잊음’에 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했고, 어떻게 헤어졌고, 왜 아직도 기억하는지. 영화는 그 감정의 잔해들을 손으로 쓸어 담듯 천천히 그려냅니다.
어쩌면 사랑은 결국 다 지나가는 것이지만, 그 지나간 자리에 남는 감정의 풍경은 각자의 삶에 아주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내 묻습니다.
“당신은, 그 유통기한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버릴 수 있나요?”
만약 마음 한편에 아직 못 버린 기억이 있다면, 《중경삼림》은 그 기억과 조용히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줄지도 모릅니다. 차가운 감성의 화면 속에서, 이상하게 따뜻한 마음이 살아나는 영화. 그것이 바로 《중경삼림》입니다.